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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광개토대왕

廣開土王 戰略.戰術

[廣開土王은 周邊國을 征伐함에 있어 어떤 手順과 戰略.戰術을 使用하였는가?]


1. 광개토왕 전략.전술


사람들은 광개토왕을 가리켜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힌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광개토왕이 어떤 신묘한 전략.전술을 사용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넓혔는지? 광개토왕이 넓힌 영토는 어디까지였는지? 광개토왕은 넓힌 영토를 어떤 방법으로 다스렸는지? 등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광개토왕이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가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광개토왕 특유의 통치술과 신묘한 전략.전술 때문이었다. 광개토왕이 어떤 전략.전술을 사용하여 영토를 넓혔고, 넓힌 영토를 어떤 방법으로 다스렸는지 살펴본다.

광개토왕은 고구려 故國壤王의 아들로 태어나서 A.D 386년에 태자로 된 분으로 본명은 談德이다.

담덕이 태자로 되었을 무렵 고구려의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남으로 백제 및 신라와 대치하고 있었고, 서쪽으로 後燕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북으로 東夫餘와 대치하고 있었고, 동으로 와 대치하고 있었다. 즉 당시 고구려는 사방으로 적대국들에 둘러싸여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었다. 반면에 仇台百濟는 A.D 204년 10월에 帶方故地(황해도 방면)에서 입국하여 A.D 205년에 溫祚百濟와 馬韓聯盟을 정복하였고 A.D 205-208년경에는 對馬島, 日本列島 및 加耶國 대부분을 복속시켰으며, A.D 313 - 314년경에 慕容氏(A.D 337년 燕을 칭함)와 동맹을 맺고 遼西에 진출하여 柳城郡(조양 방면)과 北平郡(난하 서쪽) 사이에 百濟郡을 두었고, 西晋이 망하는 A.D 316년에는 양자강하류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여 (宋나라 때) 辰平郡 자리에 百濟郡을 두었으며, A.D 371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故國原王을 戰死시키고 平壤(저자는 이 평양을 일시 제2 수도로 사용한 황해도 신원군 장수산 소재 장수산성으로 보고 있다)을 점령하여 국력이 아주 강성해져 있었다. [참고: 백제의 요서 및 중국동해안 진출시기 등에 대하여는 본서 백제 장의 구태백제 항 참조]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에 군을 가지고 있었다. (요서에 있는 군은) 지금(당나라 때)의  유성과 북평 사이에 있었다. 晋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通典 百濟傳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麗在遼東之東千餘里 晋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南史 百濟傳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 百濟傳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여 다스렸다. (중국동해안 방면의) 백제의 치소는 (송나라 때) 진평군 진평현이 있던 곳이다.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宋書 百濟傳 [註 진평군은 백제의 군현 이름이 아니고 송나라가 A.D 468년에 복건성 복주 방면에 설치했다가 A.D 471년에 폐지한 군현의 이름이다.]


A.D 386년경 고구려와 그 주변


2. 백제 정벌


고국양왕 3년(A.D 386년)에 태자가 된 談德은 온조백제를 공격해 보았으나 北漢城(삼국유사에는 양주로 적혀 있으나, 사학자들은 북한산 방면으로 보고 있다)을 수도로 한 溫祚百濟와 熊津을 수도로 한 仇台百濟가 같은 세력임을 알고 공격을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3년조에는 그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고국양왕 3년(A.D 386년) 봄 정월 왕자 담덕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8월 왕은 군사를 내어 남으로 백제를 쳤다. 겨울 10월 복사꽃(桃) 오얏꽃(李)이 피었다. 소(牛)가 말(馬)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 꼬리가 둘이었다. 三年 春正月 立王子談德爲太子 秋八月 王發兵南伐百濟 冬十月 桃李華 牛生馬 八足二尾」


위에 나온 복사꽃(桃), 오얏꽃(李)은 같은 발음의 島夷 즉 倭를 군사로 사용한 仇台百濟와 외교적으로 어떤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위에 나온 소(牛)는 소마리(牛頭.牛首:일명 소시모리. 소의 머리를 한 농사의 神을 숭배한 송화강 유역 등 요하 동쪽 농경지방 지칭)에서 이주한 구태백제를 가리키고, 말(馬)은 마한 지역에서 건국된 온조백제를 가리킨다. 그리고 소(牛)가 말(馬)을 낳았다는 것은 구태백제가 부모(종주국)이고 온조백제가 자(복속국)라는 뜻이며, 발이 여덟 꼬리가 둘이라는 것은 몸뚱이가 붙어 있다는 뜻으로 구태백제와 온조백제가 같은 세력이라는 뜻이다.

위 문구의 의미는 담덕이 8월에 온조백제를 공격하였다가 10월에 구태백제와 외교적으로 어떤 접촉이 있은 후 구태백제와 온조백제가 같은 세력임을 알고 공격을 중지하였다는 내용이다. [註 삼국사기 본기에서 桃李가 나오는 시기를 살펴보면, 고구려본기에는 고국양왕 3년조(冬十月 桃李華), 문자왕 3년조(冬十月 桃李華), 안원왕 10년조(冬十月 桃李華),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3년조(冬十月 雷 桃李華)에,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 23년조(冬十月桃李華), 내해니사금 8년조(八年 冬十月 靺鞨犯境 桃李華), 진흥왕 원년조(冬十月 地震 桃李華), 흥덕왕 8년조(冬十月 桃李再華), 경문왕 3년조(冬十月, 桃李華), 경덕왕 22년조(二十二年 八月 桃李再花) 등에 나온다.

위 문구는 이 무렵 桃李로 지칭되는 세력과 어떤 접촉이 있었음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또 桃李가 나오는 시기는 대부분 10월인데, 이는 당시 10월이 상달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상달인 10월에 桃李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군사적 접촉이 아니라 외교적 접촉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경덕왕 22년 8월조 “桃李再花”는 자연현상을 적은 것인지 아니면 정월에 이어 8월에도 외교적 접촉이 있었는 것을 적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위 문구 외에도 은유법으로 적혀 있는 문구가 무수히 많다.]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같은 세력임을 알게 된 담덕은 백제에 대한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즉 여태까지 백제 공격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외교실패로 서쪽 방면의 후연 및 남쪽 방면의 백제와 모두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군사력이 서쪽과 남쪽으로 분산된 점,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같은 세력인 점, 제해권을 구태백제가 장악하고 있는 점 등을 깨닫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정책을 취하였다.

-水軍을 강화하였다. 이는 제해권을 장악하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상륙전술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이 정책으로 고구려는 백제보다 월등히 강한 수군을 보유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수군은 그 뒤 A.D 392년에 수만 명이 동원된 한강하류 방면 상륙작전과 A.D 396년에 역시 수만 명이 동원된 금강하류 방면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외교적으로 백제를 고립시켰다. 이를 위하여 담덕은 그 전까지 적대관계에 있던 燕나라에 조공하여 고구려와 後燕을 우호관계로 만들었다. 


<참고 :모용씨(연)와 백제,고구려 관계>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까지는 모용씨 및 그 후신인 전연, 후연과 적대관계에 있었고  전진과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반면에 백제는 모용씨 및 그 후신인 전연, 후연과 동맹관계에 있었다. 그런데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9년조에는 고구려가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후연에 조공하기 시작한 해가 언제인지 나오지 않지만 고구려가 백제 공격을 시작한 A.D 392년 7월 이전으로 추정된다. 

아래에 모용씨(연)과 백제, 고구려와의 관계를 살펴본다.

진시에 모용씨는 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하여 낙랑, 대방과 동맹을 맺고 그곳에 모용씨의 장군 장통을 보내어 고구려를 남쪽과 서쪽에서 포위 공격하였다.


「건흥 원년(A.D 313년) 전략. 4월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상공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더니..後略,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後略」 資治通鑑 晋紀10


고구려 미천왕은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남으로 낙랑과 대방을 공격하여 낙랑군은 A.D 313년에, 대방군은 A.D 314년에 각 궤멸시킨 후 진의 평주자사 최비와 난하 방면의 단씨, 우문씨와 연합하여 모용씨를 포위.압박하였다. 


「미천왕 14년(A.D 313년) 겨울 10월에 대방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미천왕 15년(A.D 314년)봄 정월에 왕자 사유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미천왕 20년(A.D 319년) 겨울 12월에 진 평주자사 최비가 도망쳐 왔다. 이전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나라(고구려)와 단씨, 우문씨를 달래어 함께 모용외를 치게 하였다. 二十年 冬十二月 晉平州刺史崔毖來奔 初 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 使共攻慕容廆.後略」


모용씨는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낙랑, 대방의 잔존 무리들을 모용씨 영역으로 이동시키고, 백제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쪽을 포위.압박하였다. 또 백제를 모용씨 영역 내인 발해연안 요서지역에 진출시켜 난하 방면의 단씨, 우문씨와 대치하게 하므로서, 백제를 이용하여 단씨, 우문씨,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이때 백제가 진출한 발해연안 농어업지역에 대하여 중국의 사서에는 당 시대의 북평군(난하 방면)과 유성군(대릉하 인근 조양 방면) 사이라고 적혀 있다.


「건흥 원년(A.D 313년) 전략. 4월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상공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더니,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민 1,000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케 하였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에,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為之置樂浪郡 以統為太守 遵參軍事」 資治通鑑 晋紀10

「함화 8년(A.D 333년) 여름 5월 모용외가 졸하였다. 6월 세자 황이 평북장군행평주자사로 부내를 독섭하고, 죄인을 사면하고, 장사 배개를 군자제주에, 낭중령 고후를 현도태수에, 대방태수 왕탄을 좌장사에 각 삼았으나, 왕탄은 요동태수 양목이 재능이 있다 하여 미루므로, 이를 받아들여 우장사로 삼았다. 夏 五月 甲寅 遼東武宣公慕容廆卒 六月 世子皝以平北將軍行平州刺史 督攝部內 赦系囚 以長史裴開為軍諮祭酒 郎中令高詡為玄菟太守 皝以帶方太守王誕為左長史 誕以遼東太守陽騖為才而讓之 皝從之 以誕為右長史」 資治通鑑 晋紀17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에 군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당)의 유성군과 북평군 사이에 있었다. 晋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通典 百濟傳


이때부터 모용씨(A.D 337년 燕으로 稱)와 백제는 동맹관계에 있었다.


또 미해를 인질로 보내고 구태백제에 복속하고 있던 신라를 위협하여 실성을 인질로 받아, 신라와 고구려를 동맹관계로 만들고, 신라와 백제를 적대관계로 만들었다.


「내물이사금 37년(A.D 392년) 정월 고구려에서 사신이 오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인질로 잡혔다. 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飡大西知子實聖爲質」


담덕의 이러한 정책은 백제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즉 신라와 고구려가 동맹세력이 됨으로써 백제는 고구려와의 국경 외에 신라와의 국경에도 군사를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백제 군사의 신라 국경 배치는 백제 전력의 분산을 가져와 서해안 방면의 방위력이 허술해졌으며, 서해안 방면의 방위력 약화는 고구려 수군이 서해안에서 상륙작전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반대로 고구려는 후연과 우호세력이 됨으로써 후연 방면에 배치한 군사를 백제 방면에 집중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온조백제에 일부러 져주어 온조백제를 교만하게 만들었다.


「진사왕 5년(A.D 389년)가을 9월 왕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변을 침략하였다. 五年 秋九月 王遣兵 侵掠高句麗南鄙」

「진사왕 6년(A.D 390년) 가을 9월 왕은 달솔 진가모를 시켜 고구려를 쳐 도곤성을 빼앗고 2백 명을 사로 잡으니 王은 진가모에게 병관좌평을 제수하였다. 九月 王命達率眞嘉謨 伐高句麗 拔都坤城 虜得二百人 王拜嘉謨爲兵官佐平」 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백제는 A.D 387년 9월에 말갈과 관미령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A.D 391년 4월에는 말갈에게 북변의 적현성을 빼앗겼다.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말갈은 고국양왕이 보낸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아니고 당시 고구려에 복속한 강원도 지방 무리로 추정된다. 당시 온조백제는 말갈과의 싸움에서도 이기지 못 할 정도였는데도 고구려는 온조백제의 공격에 도곤성을 빼앗겼다. 이는 온조백제를 교만하게 만들어 온조백제와 구태백제를 이간시키려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담덕이 일부러 져준 것도 모른 채 연이어 이긴 것에 고무되어 극도로 교만해진 온조백제 辰斯王은 담덕의 이간전술에 놀아나 구태백제의 도움 없이도 온조백제만으로 고구려를 상대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구태백제를 배신함으로써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간에 불화가 일어났고,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간의 불화는 백제 전력의 분열을 가져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백제 진사왕이 구태백제를 배신한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진사왕 7년 가을 7월 서울 서쪽에 있는 큰 섬에서 사냥하면서 왕이 친히 사슴을 쏘았다. 8월 다시 횡악(삼각산)의 서쪽에서 사냥하였다. 秋七月 獵國西大島 王親射鹿 八月又獵橫岳之西」 三國史記 百濟本紀


위 문구에 나오는 사냥은 같은 동족끼리 싸운 사실을 은유법으로 적을 때 흔히 사용되는 용어이다. 위 문구는 온조백제 진사왕이 직접 강화도로 출동하여 강화도에 있는 구태백제 수군기지를 공격하였다는 것과, 다음달 8월에 구태백제 군사가 온조백제 진사왕을 응징하기 위하여 횡악(삼각산)의 서쪽 방면 즉 온조백제 수도의 서쪽 방면으로 출동하였을 때 진사왕이 친히 나가 구태백제 군사를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광개토왕의 이간전술에 놀아난 온조백제 진사왕이 온조백제 서쪽 섬에 있는 구태백제 수군기지를 점령하여 구태백제 수군을 강화도에서 쫓아버림으로써, 온조백제의 서해 방면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되었다. 이는 다음해 7월에 고구려 수군이 서해를 통하여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후연에 조공하여 후연과 고구려를 우호관계로 만들고, 구태백제와 온조백제를 이간시켜 백제를 분열시키는데 성공한 광개토왕은 A.D 392년 7월부터 백제를 공격하였다.

A.D 392년 7월 광개토왕은 군사를 보내어 온조백제와 신라와의 접경인 구원 방면에서 성동격서 작전을 펼쳐 온조백제 군사가 구원 방면으로 몰림으로써 온조백제의 西海岸 방면 방위가 허술해졌을 때, 水軍을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시켜 한강 이북에 있는 10여 성을 빼앗고 關彌城으로 통하는 양도를 끊었다. [註 온조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이 있기 전 도성을 북한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관미성은 서해에서 한강을 통하여 수도 남한성으로 가는 입구를 지키던 성으로 한강하류나 강화도 방면에 있었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진사왕이 구원의 행궁에 있었는 시기가 10월부터 11월까지로 적혀 있으나 7월에 고구려 수군이 수도와 가까운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 10여 성을 점령하였을 때 온조백제가 전혀 항거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아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신라 방면에서 공격해 올 것으로 믿고 고구려의 공격이 시작된 7월 이전에 이미 광개토왕의 성동격서 전술에 속아  주력부대를 이끌고 구원 방면으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위 구원은 신라와의 접경 방면이나 그 위치는 불명이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A.D 396년에 광개토왕이 구태백제를 공격하였을 때 웅진(공주), 임천(부여 임천), 와산(보은) 괴구(괴산) 복사매(영동), 우술산(대덕), 진을례(금산), 노사지(유성) 등지 성을 점령한 후 속리산에서 제천행사를 치르고 돌아왔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온조백제 지역인 구원은 구태백제 지역보다 더 북쪽에 있었을 것이므로, 괴산, 수안보, 충주 방면이거나(조령을 넘어갈 경우), 단양, 제천 방면(죽령을 넘어갈 경우)으로 추정된다]


진사왕 8년 7월에 있은 광개토왕의 공격에 진사왕이 전혀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당한 것은 靑木嶺(개성 부근)에서부터 북으로 八坤城까지 설치한 關防(방어진지)과 한강하류 방면에 있는 관미성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즉 진사왕은 고구려 군사가 온조백제의 관방이 있는 전방이나, 관미성이 있는 한강하류 방면을 피하여 신라 방면에서 공격해 올 것으로 믿고 전 해에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구태백제 水軍을 쫓아버림으로써 西海 방면의 방위력이 허술해져 있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동쪽 狗原 방면으로 갔다가 고구려 수군에게 서해 방면의 방위력이 허술해진 허를 찔렸다.

같은 해 10월 고구려 군사는 西海에서 한강을 통하여 수도 남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지키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광개토왕 원년 겨울 10월 백제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락시켰다.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초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진사왕 8年(A.D 392年)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해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한 내용이 나오지 않으나, 온조백제는 광개토왕에게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온조백제는 수도 방어의 요지인 관미성이 함락당한 후 고구려의 공격에 수도를 방어할 힘이 없었는데도 고구려는 온조백제의 수도를 점령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이는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A.D 392년 전쟁에서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패배한 것은 진사왕이 광개토왕의 이간전술에 놀아나 구태백제를 배신함으로써 광개토왕의 공격 때 구태백제의 지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應神天皇紀 3년조에는 진사왕이 구태백제를 배신한 사실이 우회적으로 적혀 있고, A.D 392년 10월에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자 다음달 11월에 기각숙니 등 장군들을 온조백제로 보내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세우고 돌아왔다고 적혀 있다. 이로서 온조백제는 10월에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다가 11월에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응신천황 3년(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이 귀국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 등을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註 온조백제)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 등은 아화(註 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三年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禰 羽田矢代宿禰 石川宿禰 木菟宿禰 嘖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禰等便立阿花爲王而歸.」日本書紀 [註 일본서기 응신천황기 3년조에는 구태백제왕과 온조백제 진사왕과의 관계가 응신천황과 진사왕과의 관계로 적혀 있다. 즉 응신천황과 구태백제왕이 동일인물로 적혀 있다. 이는 일본서기를 만들 때 구태백제 존재를 말살하고, 구태백제왕이 한 일을 마치 大和倭 天皇이 한 것처럼 日本書紀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비문이나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한반도 백제 지역에 百殘(온조백제)과 伊殘(구태백제)이 있었다고 적혀 있고, 倭는 백제의 보좌였다고 적혀 있다.]

「진사왕 8년 겨울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돌아갔다. 冬十一月 薨於狗原行宮」 三國史記 百濟本紀


온조백제가 다시 구태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자 광개토왕은 구태백제를 멸망시켜야 온조백제를 계속 복속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때부터 4년간 전쟁준비를 한 후 A.D 396년에 몸소 수군을 이끌고 금강하류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수도 등지를 점령하고, 이어서 보기병을 남진시켜 아리수(한강)를 건너 도성을 공격하여 온조백제를 다시 항복 받았다.

광개토왕비문과 환단고기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국이어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왜가 신묘년(A.D 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00.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신민으로 만들었으므로, 영락 6년에 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이잔국을 토벌한 후 대군을 남진시켜..중략..왕은 발연히 대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봉부대를 보내어 그 도성을 핍박하니 백잔왕이 곤핍하여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귀복하였다. 백잔왕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백잔왕이 처음에 깨닫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뒷날 정성스레 순종할 것을 다짐받았다. 이 싸움에서 백잔국의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되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0 以辛卯年倭來渡 破百殘00新羅 以爲臣民以 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伊殘國 軍南進..中略..其國城0不0義敢出00 王威赫怒渡阿利水 遣刺迫城00000便國城 百殘王困逼 獻0男女生九一千人細布千匹 殘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錄 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村七百 將殘王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廣開土王碑文 永樂六年條 [註 구태백제를 비하하여 伊殘으로 적혀 있고, 온조백제를 비하하여 百殘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응신조 왜는 倭로 적혀 있으며, 구태백제도 응신조 왜와 동일세력이라고 비하하여 倭로 적혀 있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왔다. 帝躬率水軍 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期早朝祭天 以環」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이때 광개토왕이 거느린 고구려 수군이 점령한 지역은 구태백제의 수도가 있는 공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방이고, 금강 이남 전라도 지방은 점령하지 못하였다. 이때 구태백제의 지배계층은 일본열도로 피신하였다.]


일본서기 응신천황기 8년조에도 그 사실이 적혀 있다.


「응신천황 8년(A.D 397년) 봄 3월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백제기에 말하였다. 아화가 왕이 되어 귀국에 무례하였다. 때문에 우리의 침미다례,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先王의 수호를 다시 하였다.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 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 支侵 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日本書紀 [註 이때 광개토왕이 가야 지방과 제주도 등지를 빼앗았던 것은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해상통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


광개토왕 즉위 후 고구려가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승리한 원인


A.D 392년 이전까지는 고구려가 백제에게 평양성을 점령당하거나 국경 부근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다가 광개토왕이 즉위한 A.D 392년부터 A.D 404년까지는 고구려가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승리하였다. 이는 광개토왕의 탁월한 외교술과 전략.전술 때문이었다.

광개토왕 재위 시 구태백제의 전략.전술과 고구려의 전략.전술을 비교해 보면, 구태백제는 보병전술과 기마전술을 주 전술로 사용하였고 상륙전술은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보조하는 전술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륙전술에 동원된 배는 왜가 사용하던 小艇이었고, 이 소정에는 대략 20-3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륙전술에 동원된 倭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반면에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까지는 주 전술로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사용하다가 광개토왕 때부터 해상전과 상륙전에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이 승선할 수 있는 大艦과 水軍을 대량으로 보유하였다. 그 결과 광개토왕 때부터 고구려 水軍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해졌다.

A.D 392년에 고구려 수군이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에 있는 10여성을 빼앗고 관미성으로 통하는 양도를 끊어 관미성을 고립시킨 것, A.D 396년에 고구려 수군이 금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본거지인 웅진 등을 점령한 것, A.D 400년에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對馬島(任那加羅)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왜를 복속시킨 것, A.D 404년에 대방계로 침입한 倭를 물리친 것 등은 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3. 임나(대마도)와 伊(대화왜), 倭(구주왜) 정벌


영락 9년(A.D 399년)에 응신조 왜 군사가 신라를 공격하자 광개토왕은 영락 10년(A.D 400년)에 보기병 5만을 보내어 倭를 물리치고 왜를 추격하여 임나가라(대마도)를 점령한 후 이어서 일본열도왜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광개토왕비문과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그 내용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영락 9년(A.D 399년) 기해 백잔은 맹세를 어기고 왜인과 더불어 화통하였다. 왕이 남쪽으로 평양에 내려가 순시하는데, 마침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께 고하되 왜인들이 그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를 파괴하니 노객은 백성을 위하여 왕을 찾아 뵙고 명을 청한다고 하였다. 九年 己亥 百殘違誓與倭密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0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000其忠00遣使環告以00」廣開土王碑文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관병이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가 가득하였다. 관병이 이르자 왜가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관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하였다. 안라인 수병이 신라성 ( )성을 점령해 있었다. 왜가 가득차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안라인 수병이 口口에 가득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口口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안라인 수병. 전에는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 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十年 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 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口其中官(兵)方至倭賊 退(第2面9行)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第2面10行)被我攻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 (第3面1行)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取卓淳而佐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潰 (第3面2行) 遂分爲郡安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 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第3面3行) 口口口口朝貢.」[註 파란색 글자는 비문징실로 보충한 것임]

「한번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를 격파하였다(註 영락 10년 사실). 왜인(註 응신조 왜 지칭)은 백제(註 구태백제 지칭)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註 영락 9년 사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오다(註 영락 6년 사실). 때(註 영락 10년)에 백제, 신라, 가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 평양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 왜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一自渡海 所至擊破倭人 倭人百濟之介也 百濟先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躬率水軍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 以環 時則 百濟新羅駕洛諸國 皆入貢不絶 契丹平凉皆平服 任那伊倭之屬 莫不稱臣」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영락 6년조, 9년조, 10년조 사실이 함께 뒤섞여 적혀 있다. 광개토왕비문에는 구태백제가 이잔 또는 왜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구태백제가 伊 또는 倭로 적혀 있다. 이 伊는 부여 무리라는 뜻으로 부여 무리가 이주하여 세운 구태백제 또는 구태백제계 무리가 이세, 대화 등지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고 근국의 명칭을 사용한 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倭는 서.남해 섬, 대마도, 일본열도 등지에 거주한 왜 무리 또는 이들과 같은 세력인 마한이나 구태백제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4. 유주,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A.D 396년에 구태백제가 괴멸되고 온조백제가 항복한 후 A.D 400년에 대마도왜와 일본열도왜 마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의 백제장군들이 광개토왕에게 귀복함으로써 고구려는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와 요서분국을 접수하였다.


유주

광개토왕 때 고구려가 유주(하북성 방면) 등지를 영유한 사실이 고분벽화에 암시되어 있다.

1976년에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기슭에 유주자사를 지낸 사람의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그 고분이 주목을 끄는 것은 벽화와 600여자에 달하는 묵서 때문이다. 그 중 고분 전실 북벽 상단에 적혀 있는 묘지명 14행 154자와 고분 전실 서벽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들의 직책은 광개토왕이 후연의 유주자사와 13군 태수들을 귀복시키고 유주 등지를 영유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묘지명(전실 북벽 상단)

  


1行 00郡信都(註1)彰都鄕0甘里 2行 釋迦文佛弟子00氏鎭(註2)仕, 3行 位建威將軍國小大兄佐將軍, 4行 龍驤將軍遼東太守使持, 5行 節東夷校尉幽州刺使鎭(註3). 6行 年七七薨焉以永樂十八年, 7行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卄五日. 8行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주공이 터를 잡고), 9行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공자가 일을 잡고, 무왕이 시를 뽑은 것처럼 정성을 다하여 장지와 일과 시를 잡아 옥구를 장지로 옮겨), 10行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잘 장례를 치루었다. 이후 부귀가 7세 자손까지 미치고) 11行 番昌仕宦日遷位至侯王(자손의 벼슬이 나날이 올라 후왕에 이르고). 12行 造藏萬功日煞牛羊酒0米桀(많은 공을 세우게 되리라. 날마다 소와 양을 잡고 좋은 쌀로 술을 빚어), 13行 不可盡掃旦食鹽시養一양記(아침 공양에 음식, 소금, 된장이 떨어지지 않으니 이를 기록하여), 14行 之後世寓寄無絶(後世에도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註1 신도는 유주자사 진이 고구려로 귀화하기 몇 년 전까지 후연 모용수가 기주의 치소로 사용한 곳이다(冀州..慕容垂治信都. 宋書). 註2 주인공의 성은 지워져 알 수 없으나, 이름은 진이다. 註3 유주자사진은 유주자사가 주재한 곳으로 유주자사는 북경 방면의 행정권과 군권을 함께 장악한 벼슬 이름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죽은 영락 18년 이전 가장 가까운 시기에 유주자사진을 둔 나라는 후연이다. 후연은 북위와의 싸움에 패하여 수도 중산을 빼앗기고 모용보 때 수도를 동쪽 화룡(조양)으로 옮겼고, 그뒤 즉위한 모용희는 자사진도 동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유주자사진은 영지에, 청주자사진은 신성에, 병주자사진은 범성에, 영주자사진은 숙군에, 기주자사진은 비여로 각 옮겼다. 뒤에 나오는 13군 태수들 명칭으로 보아 위 문구에 나오는 유주자사진은 북경 방면에 있을 때이다. 註4 '辛酉朔卄五日乙酉'은 12월 1일이 신유이고 25일이 을유라는 뜻이다.]


-위 묘지명 문구에 의하면 피장자는 00군 신도 창도향 0감리에서 태어나서 영락 18년에 77세로 죽었다. 삼국사기 잡지에 고구려의 벼슬에 자사가 보이지 않고, 또 소형 대형이 고구려 벼슬인 것으로 보아, 피장자는 후연에서 유주자사 등 벼슬을 하다가 광개토왕에게 귀복한 후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받고, 또 소형, 대형 등 고구려 벼슬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은 귀복한 사람들에게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 피장자가 죽은 해는 영락 18년(A.D 408년)이므로, 피장자가 후연에서 유주자사를 지낸 시기는 A.D 408년 이전이다.


무덤의 주인공 진과 전 후연의 13군 태수들


고분 전실 서벽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들

-고분 전실 서벽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들의 직책은 범양태수, 어양태수, 연군태수, 상곡태수, 대군내사, 광녕태수, 북평태수, 요서태수, 창려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 낙랑태수, 대방태수이다.

-고구려와 후연간에 동맹관계가 깨어지고 적대관계로 변한 해는 A.D 400년이므로,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이 광개토왕에게 귀복하므로써 고구려가 후연의 유주 등지를 차지한 해는 A.D 400년으로 보인다.

-13군 태수들의 관할 지역 중에는 유주자사진 관할이 아닌 것도 있다. 그런데도 이들이 고구려에 귀복한 후 유주자사 진을 모셨다는 것은, 광개토왕 특유의 통치술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이 고구려로 귀복하는데 유주자사 진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13군 태수들이 광개토왕에게 귀복하게 된 배경을 살펴본다. 광개토왕 재위시기 중 A.D 400년까지는 고구려와 후연이 동맹관계였는데, A.D 395년에 후연이 남진하는 북위에 패하므로서, 후연의 유주는 북위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 광개토왕은 동맹국인 후연의 유주를 지켜주다가 A.D 400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을 고구려에 귀복시키고 유주 등지를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고구려와 후연은 A.D 400년부터 동맹관계에서 적대관계로 변하였다(자치통감 진기 33년조 참조). 진서지리지에는 후연 모용보가 수도를 중산에서 용성(조양)으로 옮길 때 유주 방면이 북위의 영토로 변하였다고 적혀 있으나(自幽州至子廬溥鎮以南地入於魏), 광개토왕에게 복속한 후연의 13군 태수들 중에 범양태수, 어양태수, 연군태수, 상곡태수, 대군내사, 북평태수, 요서태수 등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도 유주는 후연의 영토로 남아 있다가 A.D 400년에 고구려의 영토로 변하였다. 광개토왕이 전쟁없이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을 귀복시키고 그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만든 것은 귀복한 이들에게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광개토왕 특유의 통치술 덕분이다.


A.D 400년경 고구려 영역


5. 후연 정벌


광개토왕 재위 시 고구려 주변에 있는 나라 중 국력이 가장 강한 나라는 백제와 後燕이었다. 광개토왕은 백제를 먼저 정벌한 후 다음으로 후연을 정벌하였다.

광개토왕의 후연 정벌 과정을 살펴본다.

광개토왕은 백제와 우호관계에 있는 후연에 조공하여 백제와 후연을 갈라놓고 고구려와 후연을 우호관계로 만들었다. 하지만 훗날 후연 정벌에 대비하여 미리 후연의 북쪽에 있는 거란을 정벌하였다.


「광개토왕 원년(A.D 392년) 9월 북으로 거란을 쳐 남녀 5백명을 사로잡고 또 본국에서 흩어진 인구 1만명을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 而歸」

「영락 5년은 을미였다. 王은 비려가 조공하지 않으므로,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하였다. 부산을 지나 00에 이르러 염수(註 시라무렌하 방면) 가에서 비려의 3부족 6,7백 부락을 격파하고 소와 말, 양떼 등의 노획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은 수레를 돌려 0평도를 거쳐 동으로 0성, 역성, 북풍의 영토를 두루 살피고 사냥을 하면서 돌아왔다.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不貢 00躬率往討 過富山00至鹽水上 破其三部族六七百營 牛馬   羊不可稱數 於是 旋駕因 過0平道 東來0城力城北豊 王備獵遊觀土境田獵以還」廣開土王碑文 [註 광개토왕이 A.D 395년에 후연의 북쪽에 있는 거란을 정벌한 것은 백제 정벌이 끝난 후 후연을 정벌하기 위한 원대한 포석이었다.]


광개토왕은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백제의 요서분국과 후연의 유주 등지를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므로써, 후연을 동(고구려), 서(유주), 남(북평에서 유성 사이 전에 백제 요서분국), 북(거란)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그 후 후연의 요동태수(요양 방면)와 현도태수(심양 방면)를 귀복시켜 북진에서 단단대령 사이 후연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만든 후 A.D 402년에 군사를 보내어 후연의 숙군(북진)을 점령하여 후연에 대한 포위망을 더욱 좁혔다.


「광개토왕 11년(A.D 402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숙군(註 북진 방면)을 치니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十一年 王遣兵 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註 이때 고구려 군사들은 후연의 요동태수(요양방면), 현도태수(심양 방면) 관할 지역에서 후연 군사들과 싸우지 아니하고 바로 숙군을 공격하였고, 앞에 나온 고분벽화에 현도태수와 요동태수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광개토왕은 이 공격 전에 이미 후연의 현도태수와 요동태수를 귀복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도태수와 요동태수가 유주자사 진 옆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아, 후연의 현도태수와 요동태수를 귀복키는데 유주자사 진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A.D 402년경 고구려 영역

 


후연에 대한 포위망을 더욱 좁힌 광개토왕은 A.D 407년에 사방에서 후연을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영락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하여 000000000에서 우리의 군사가 4방에서 적을 공격하여 베어 죽이고 쓸어버리고 개갑 1만여령을 로획하였으며, 군수물자와 기계의 획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오면서 사구성, 루성, 00성, 00000000성을 격파하였다.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 000000000師 四方合戰 斬煞蕩盡所 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00城.00000000城」 廣開土王碑文 [註 이 무렵 고구려는 후연을 북으로는 거란 방면에서, 남으로는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 방면에서, 서쪽으로는 전에 후연의 유주 방면에서, 동으로는 북진 방면에서 각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이때 후연을 4방에서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후연은 이 공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내분이 일어나 멸망하고 고구려계 고운이 왕이 된 북연이 세워졌다. 진서에 의하면 이 해 모용희가 죽고 고구려 왕족 고화의 손자 고운(모용보가 양자로 삼음)이 왕이 되었고, 왕의 성씨를 후연의 "모용"씨가 아니라 고구려의 "고"씨를 사용한 것을 보면, 후연은 이때 고구려의 위성국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년 뒤인 A.D 409년에 풍발이 북연을 세우므로서 북연과 고구려의 관계는 멀어졌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모용희를 제거하고 고운을 왕으로 추대한 풍발의 고향이 유주자사 진과 같은 장락군 신도현이고, 유주자사 진이 A.D 408년 12월에 죽자 다음해 A.D 409년에 북연을 세우고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를 보면 광개토왕의 후연 공격 때 유주자사 진과 같은 고향인 풍발이 유주자사 진의 영향력으로 모용희를 죽이고 고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가 유주자사 진이 죽자 다음해 북연을 세우고 고구려와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


6. 그 외 주변국 정벌


북부여

모두루 묘지에 의하면  광개토왕은  모두루 등을 귀복시키고 전쟁없이 북부여(장춘 방면)로 진출하였다.


「전략. 조부 대형 염모(재모?)..중략..조부00, 대형 자0, 대형 00를 거치기까지 대대로 관직의 은혜와 물품을 하사받아 왔다. 조부는 벼슬길에 나가 성민과 곡민을 함께 다스렸다. 전왕들의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광개토왕 대에 이르러 조부의 인연에 따라 노객인 모두루와 00모에게 북부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前略.祖大兄염(再?)牟壽盡00於彼喪亡사由祖父00大兄慈0大兄000世遭官恩恩賜祖之0(出?)道城民谷民竝領前王0育如此還至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緣祖父0爾恩敎奴客牟頭婁00牟敎遣令北夫餘守事」


백신.토욕

광개토왕은 영락 8년에 백신(연해주 방면 숙신 지칭)과 토욕(감숙성, 청해성 방면 토욕혼 지칭)을 정벌하였다.


「8년은 무술년이었다. 정예부대를 백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구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곳의 남녀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들은 이때부터 조공을 바쳐오게 되었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得 莫0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口事」 廣開土王碑文 永樂八年條 [註 백신과 토욕의 정확한 위치는 사학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으나, 백신은 숙신을 지칭한 것이다. 숙신은 서천왕 11년(A.D 280년) 10월에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달가의 역습을 받아 추장이 죽고 단로성이 점령당하여 6-7개소의 부락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 후 영락 8년(A.D 398년)에 고구려가 정벌한 백신도 동부여의 동쪽인 연해주 방면이다. 그리고 토욕은 위서 토욕혼전에 나오는 토욕혼을 지칭한 것이다. 이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외의 일파였는데, A.D 4세기 초에 시조 토욕혼이 이복동생인 모용외와 사이가 벌어져서 모용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광개토왕이 토욕혼을 정벌한 A.D 398년경에는 북위의 서쪽인 감숙성, 청해성 방면에 있었다.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왕은 A.D 398년에 토욕혼과 숙신 2방면으로 군사를 보냈다. 이때 광개토왕이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한 것은 북위가 후연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수도를 성락(내몽고 呼和浩特 부근)에서 평성(산서성 대동)으로 옮기고 후연의 유주를 압박하자 북위의 배후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포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숙신을 정벌한 것은 동부여의 배후에 있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포위.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광개토왕의 죽음이 몇 년만 늦었더라면 광개토왕은 북위마저 정벌하여 북중국을 고구려의 세력권에 넣었을 것이다.]


A.D 398년 토욕혼 및 숙신 정벌


광개토왕은 영락 20년(A.D 410년)에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영락 20년은 경술년이었다. 동부여는 옛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하지 않으므로 왕은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하러 갔다. 대군이 부여성에 도착하자 동부여 전국이 두려워 하여 복종하고 000000을 바쳤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에 넓게 미치게 됨에 이에 회군하여 돌아왔다. 後略. 二十年 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城國駭000000000 王恩普0 於是旋還」 廣開土王碑文


7. 광개토왕의 주변국 정벌순서


광개토왕의 주변국 정복순서는 고단자들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아주 정교한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만약 이러한 수순에 의하지 아니하고 정복활동을 벌였더라면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은 틀림없이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고구려는 백제와 후연 등 주변국의 합공을 받아 멸망했을 것이다.

광개토왕의 주변국 정벌순서를 정리해 본다.

광개토왕은 고구려 주변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백제와 후연 중 먼저 백제를 정벌하였고,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온조백제와 구태백제를 이간시키고, 후연과 백제를 적대관계로 만들고 후연과 고구려를 우호관계로 만들었다.

A.D 392년 정월에는 백제의 동쪽에 있는 신라를 복속시켜 백제를 북쪽과 동쪽 양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같은해 7월에는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한수 이북 10여성을 빼앗고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같은해 9월에는 훗날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후연의 북쪽에 있는 거란을 미리 정벌하였고, 그뒤 A.D 395년에 다시 거란을 정벌하였다.

A.D 396년에는 수군을 금강하류에 상륙시켜 구태백제를 괴멸시키고 이어서 보기병으로 한강을 건너 온조백제를  항복받았다.

A.D 398년에는 북위가 후연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유주 방면으로 동남진하자 정예군사를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토욕혼)에 보내어 토욕혼을 정벌하므로써 북위를 동쪽(고구려.후연)과 서쪽(토욕혼) 양 방면에서 포위하였고, 또 군사를 동부여의 동쪽에 있는 숙신에도 보내어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동쪽(숙신)과 남쪽(고구려) 양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A.D 399년에는 구태백제가 응신조 왜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A.D 400년에 이를 물리치고 왜를 정벌한 다음 해상교통의 요지인 대마도에 임나연정을 설치하여 신라, 백제, 왜를 통제케 하였다.

A.D 400년에는 후연을 사방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유성에서 북평 사이 백제의 요서분국 장군들과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을 귀복시켜 요서지방과 유주를 고구려가 차지함으로써 고구려는 후연을 동(고구려), 서(유주), 남(유성에서 북평 사이 전 백제 요서분국), 북(거란)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A.D 402년에는 북진에서 단단대령 사이 후연 지역을 빼앗아 후연을 더욱 고립시켰고, A.D 407年에는 사방에서 후연을 공격하여 후연을 괴멸시키고 고구려계인 고운이 세운 북연을 친고구려 국가로 만들었다.

A.D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함으로써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정벌을 마쳤다.

만주 정벌을 마친 광개토왕은 마지막으로 중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당시 북중국의 강자이던 북위(이미 A.D 398년에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동,서쪽에서 포위해 놓았다) 정벌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광개토왕의 정벌활동은 끝이 났다.


8. 정복지 통치 방법


광개토왕이 주변국을 정복한 후 피정복국에 취한 정책은 조금씩 달랐다.

▶신라,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장군들, 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13군 태수들

신라는 복속을 맹세받은 후 신라 체제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를 종주국으로 섬긴 점만 제외하고는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과 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13군 태수들은 종전의 직위와 직책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이 방식은 복속을 쉽게 받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고구려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들이 쉽게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요서와 중국동해안 지방을 번갈아 가며 영유한 것도 요서와 중국동해안 지방에 있는 전 백제 장군들이 백제와 고구려에 번갈아 가면서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온조백제, 계단, 숙신, 토욕

군사를 보내어 정복한 후 피정복국으로부터 복속을 맹세받고 인질과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구태백제와 왜

고구려에 가장 적대적인 구태백제와 구태백제의 후국인 응신조 왜는 군사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임나연정

광개토왕은 신라, 백제, 가야, 왜를 복속시킨 다음 해상교통의 요지인 대마도에 10국으로 구성된 연립정부인 임나연정을 설치하여 수군을 두고 백제, 왜, 신라, 가야를 통제하였다.

▶임나연정의 백제, 신라, 왜 통제는 성공하였나?

임나연정의 역할 중 백제 통제는 실패하였다. 백제는 A.D 404년에 왜와 같이 고구려의 대방계를 공격하는 등 고구려나 임나연정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임나연정의 역할 중 백제와 일본열도왜 사이 해상통로 통제는 대체로 성공하였다. 백제와 일본열도왜는 A.D 404년에 고구려의 대방계를 공격하는 등 일시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으나 곧 임나연정의 통제를 받았다. 그 후 웅략천황 때 대화왜는 임나왕의 요구에 따라 임나에 臣 또는 장군들을 보내었고, 임나에 파견된 일본부 장군들은 임나왕의 지시를 받았다.

임나연정의 역할 중 신라 통제는 초기에는 성공하였으나 후에는 실패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미사흔을 임나연정에, 복호를 고구려에 각 인질로 보내고 임나연정과 고구려에 복속하였으나, A.D 418년에 인질로 가 있는 복호를 고구려로부터 돌려받고, 같은 해 가을 임나연정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몰래 빼내 온 후부터 고구려와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다.

광개토왕 사後 몇 년이 지나지 않은 A.D 416년에 중국동해안지방의 전 백제분국 장군들이 도로 백제에 복귀함으로써 고구려가 중국동해안 지방을 상실한 것과 A.D 418년에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 등은 장수왕의 통치술에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본 : http://home.megapass.co.kr/~hsg1000/b6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