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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 기행]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유리명왕' (펌)

[고구려 역사 기행]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유리명왕'
부여에 맞선 천연 요새서 고구려 발전 토대 마련

고구려 2대 유리명왕 때인 서기 2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기 위해 나라에서 키우던 돼지 한 마리가 달아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설지’라는 사람이 돼지를 뒤쫓아 국내 위나암이란 곳에서 겨우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설지는 유리명왕에게 이 일을 보고하면서, 국내 위나암 지역이 수도로 적합하다고 추천을 했습니다.
▲환도산성. 최근 이 곳에서는 고구려 궁궐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리명왕은 다음해에 위나암성을 쌓고 국내(國內)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 압록강 북쪽의 집안 지역이 곧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돼지로 인해 수도를 옮긴 셈이 됩니다. 그런데 과연 수도를 옮기는 거대한 일이 단지 도망간 돼지와 돼지를 키우는 관리의 말 때문에 진행될 수 있었을까요?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다워라
외로워라 이 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황조가라 불리는 이 시는 몹시 외로운 주인공의 심정을 노래합니다. 이 시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유리명왕이었답니다. 왕이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명령하며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요. 하지만 왕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또 왕이기에 남보다 불행해진 경우도 많습니다.
유리명왕은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살다가, 뒤늦게 아버지가 고구려 왕이 된 것을 알고 동부여에서 탈출해 온 분입니다. 그가 왕이 되자, 가장 힘들어 한 사람은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에 크게 도와 준 소서노와 그녀의 자식인 비류와 온조였습니다.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들이 고구려 왕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소서노와 비류, 온조는 무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가서 백제를 세웠습니다.
소서노 세력이 빠져 나가자 고구려의 국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리명왕은 새롭게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야 했습니다. 첫째 부인인 송씨 왕후가 1 년 만에 죽자, 왕은 강력한 힘을 가진 골천 출신의 화희와 한족 출신의 치희를 새로운 왕후로 맞이합니다. 유리명왕은 결혼을 통해 고구려의 힘을 모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화희와 치희 왕후가 서로 질투하며 싸우다가 끝내 치희가 화가 나서 궁궐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왕이 치희를 쫓아갔지만, 그녀를 돌아오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유리명왕은 큰 힘을 가진 화희의 세력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리명왕은 이 때 황조가를 부르며 슬픔을 달래야 했을 뿐입니다.
▲집안 시 전경. 지금은 한적한 소도시지만, 과거에는
고구려의 중심지였다.
유리명왕은 주변의 선비족을 공격하여 그들을 복종시키는 등 고구려를 힘센 나라로 만들어 갔지만, 고구려는 여전히 부여에 비하면 약한 나라였습니다.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강요하고,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유리명왕은 사랑하는 자식을 인질로 보낼 수 없어 버티다가 부여의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태자 도절이 20 세도 못 되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부여국의 억압은 거세지고, 아내에 이어 자식까지 잃어버리자 유리명왕은 크게 마음이 상했습니다.
이 때 유리명왕이 선택한 것이 부여의 위협을 막아 내기도 쉽고, 국력을 키우기에도 적합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운 변화를 꾀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국내성은 산과 물이 깊고 농사짓기와 사냥과 고기잡이에도 좋아 백성들도 살기 좋고, 전쟁의 피해도 줄일 수 있는 곳입니다.
약한 나라에게는 방패 막이 되어 주는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고, 힘이 강해졌을 때에 주변으로 뻗어갈 수 있는 압록강을 비롯한 여러 교통寬?연결되어 있어 수도로서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춘 곳潔鄕熾? 돼지 사건 때문에 수도를 옮긴 것만은 아니랍니다. 고구려는 국내성을 수도로 삼아 나라를 크게 키울 수가 있었습니다.
고구려 발전의 토대를 이룬 국내성 일대의 주요 유적들은 최근 중국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 신청이 되었답니다. 장군총, 환도산성, 춤무덤과 오회분5호묘, 태왕릉 등 고구려의 대표적 유적들을 이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답니다.
하지만 국내성은 큰 나라의 수도로서는 면적이 좀 좁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427년 넓은 평야 지대에 위치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국내성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