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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한국야구사]1. 질레트

0. 들어가며...

어느날 문득 '한국야구 역사가 어떻게 되지?', '이영민 타격상의 이영민이 누구시지?'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비록 가끔 미디어를 통해서 질레트 선교사가 제일 전파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야구를 좋아한다고 자처하는 내가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야구 역사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가 없더군요, 단지 띄엄띄엄 나열된 기사나 짧게 정리된 글 정도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귀찮아 더 좋은 자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못 찾을 수 있었겠지만...)


비록 제가 공돌이 출신이라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라, 거창하게 한국야구 역사에 대해 정리한다는 건 너무 낯 간지럽고 그냥 한국역사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것들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내용은 인물 위주로 기술할 것이며, 글은 '사진으로 본 한국야구 100년', 종횡무진 인천야구'를 기본으로 인터넷과 신문을 참조할려고 합니다. (다른 참고 도서나 자료를 아시는 분은 추천 부탁 드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어려서 제대로 적을 수 있을지, 괜히 역사를 적는다면서 내용이 부실하진 않을 지 걱정부터 앞섭니다.
제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내용은 과감히 댓글이나 쪽지로 지적해주십시오.

ps1. 원래 이런 글은 오프시즌에 적어야 제맛인데, 오프시즌까지 기다리면 게으른 저의 성격 상 공부를 포기할 것 같아 결심이 섰을 때 올립니다.

ps2. 공부한 내용은 반말체로 쓰겠습니다.


1. 질레트

질레트 편은 스포츠 조선의 고석태 기자님의 야구 100년 인물열전 질레트 편을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자세하고 정리가 잘 된 내용이 없는 것 같아 거의 수정하지 않고 올리겠습니다.
미리 고석태 기자님께 허락을 구해야 되는데, 미쳐 답변을 못 받았습니다. 양해바랍니다.





1905년 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에 와서 최초로 황성YMCA 회원에게 야구를 가르쳐준 미국인 질레트 선교사(사진의 맨 오른쪽). 이 사진은 1911년 평양 신천 등지로 원정경기에 나선 YMCA야구단 모습


필립 질레트(Philip Loring Gillett:한국 이름 길례태吉禮泰). 미국의 선교사였던 그는 이 땅에 처음 야구를 소개한 사람이다.
제주도 야구박물관에 '한국야구의 문익점'이란 제목으로 명판이 전시되어 있다.

1872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났으며 콜로라도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종교학을 공부한 뒤 예일대학 YMCA 부목사로 재직하던 중 1901년 한국에 건너왔다. 질레트 선교사의 내한은 조선의 기독교 인사들이 YMCA 세계본부에 보낸 청원서가 계기가 됐다. 즉 기독교 포교를 위해 건물 설립이 시급하다는 요청을 받은 세계 본부가 회관 건립을 총괄할 수 있는 간사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그 적임자로 질레트 선교사가 뽑힌 것이다.


1901년 9월 서울에 도착한 질레트를 보고 먼저 조선에 와 있던 언더우드 목사는 “매우 젊고 정력이 넘치며 열정적인 청년”이라고 표현했다. 또 초대 황성 YMCA 회장 게일 목사는 “미국에서 그냥 산다면 얼마든지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청년이 왜 이런 오지를 찾아왔는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저런 젊은이가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겠다는 것은 정말 대견스러운 일”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질레트 선교사는 한국에 온 뒤 한국말과 한국 정서 익히기에 총력을 쏟았고, 길례태(吉禮泰)라는 한국 이름도 갖게 됐다. 질레트는 1903년10월28일 창립 총회를 가진 황성 YMCA의 간사로서 회관건립작업에 매진, 1908년12월3일 현재의 종로 2가에 YMCA 회관을 준공하게 된다.


질레트 선교사는 야구와 축구, 농구 등 운동에도 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학시절 축구팀과 야구팀 선수로 뛰었고, 테니스팀 주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내한 이듬해인 1902년 평양에서 열린 하령회(夏令會?선교사들과 신도들이 여름철에 오락과 스포츠로 친목을 다지는 모임)에서 다른 선교사 및 신도들과 가벼운 캐치볼을 했고, 이를 본 숭실학교 학생들에게도 야구를 가르쳤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기자 이길용씨가 쓴 조선 야구사(1930년)나, 일본인 오지마(大島勝太郞)가 쓴 조선야구사(1932)에는 “평양에서 집무하던 질레트가 숭실학교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한국야구의 기원”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은 1873년경 윌슨이라는 외국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을 시초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야구는 캐치볼 수준의 가벼운 운동이었으며 정식으로 게임 수준의 야구가 조선 땅에 선 보이게 된 것은 질레트 선교사의 요청으로 배트와 글러브 등 야구 장비가 들어온 뒤인 1905년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6년2월11일(음력) 훈련원 마동산에서 황성YMCA와 덕어학교의 경기가 열렸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경기이다. 이 경기에서 덕어학교팀이 3점차로 이겼다.


<사진으로 본 한국야구 100년>에서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의 간사였던 질레트가 1905년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팀인 황성 YMCA 야구단을 만든 것을 한국야구의 시초로 적고 있다. 그래서 작년(2005) 한국야구 100주년이었다.


이때는 유교적 문화로 인해 몸을 놀리고 운동하는 것을 천하게 생각하던 시기였는데, '건강, 우리 몸은 우리 영혼과 똑같이 귀중한 것이다.' 라는 YMCA 정신으로 운동을 천시하던 사회에서 야구를 도입해서 발전시켰다. 이것은 혁명적인 일이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하기에 이릅니다.


질레트 총무는 YMCA 체육활동을 통해 조선의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려 애썼다. 이런 사실은 그가 1910년 YMCA 본부에 보낸 ‘코리아리포트’에도 잘 나타나 있다. “거의 모든 경기가 야외에서 치러지고 샤워시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체육부와 실내체육반에 등록된 선수는 234명에 이른다. 한국 최초의 팀 YMCA 야구팀은 선교사들과 한국내에 거주하는 미국인들로 구성된 팀과 두 차례 경기에서 1승1무를 기록했다. 스코어는 20대20, 10대8 이었다. 이와 같은 체육 운동이 갖는 의의는 이나라 젊은이들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운동경기를 통해 진취적이고 새로운 이상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뤄진 뒤 질레트는 땅에 떨어진 청년들의 의기를 되살리기 위해 스포츠 활동에 더욱 매진했다. 1911년6월 관립 한성고와 선린상업의 연합군과 실업 연합팀과의 대전을 주선했으며, YMCA 야구 및 축구팀의 지방 원정을 성사시켜 각 지방에 스포츠를 통해 민족 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그러나 이런 질레트 총무의 노력은 결국 총독부의 탄압으로 막을 내려야 했다. 1912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 즉 ‘105’인 사건을 만들어 낸 총독부는 윤치호 당시 YMCA 부회장을 주동자로 몰아 수감시켰다. 이에 질레트 총무는 이 사건의 전모를 기록한 보고서를 영국 에딘버러 국제기독교 선교협회로 발송했으나 이 문서가 중국 일간지 차이나 프레스에 공개됐고 총독부에선 YMCA측에 질레트의 사퇴를 종용하고 나섰다. 결국 질레트 총무는 1913년 타의로 한국을 떠나 중국 YMCA로 떠나게 됐고,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는 1939년 중국에서 생을 마쳤다.


(참고) 105인 사건: 1911년 일본 경찰이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다수의 신민회원을 체포해 고문한 사건


추신. 써놓고 보니 고석태 기자님의 칼럼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네요. 이리 저리 찾아봤지만, 더 이상의 자료를 구하기가 힘듭니다. 다음편은 우리 나라 최초의 야구단 YMCA 야구단에 대해 공부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