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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한국야구사]2. YMCA야구단

1905년에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야구를 소개하면서 창설한 것이 '황성 YMCA야구단'이다.
이 비슷한 시기에 다카하시라는 일본인 교사가 관립 중학교에서 야구를 가르쳤고, 이 학교가 바로 한성학교(경기고)의 전신이다.

황성 YMCA 야구단은 덕어학교, 한성학교 등과 시합을 하며, 지방 원정까지 나서기도 했다.
한때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황성 YMCA 야구단은 모국을 방문한 유학생 야구팀과의 경기를 통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자각과 함께 비로소 팀의 체계가 정비되고 경기력도 향상되었으며 우리나라 스포츠 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인 일본 원정까지 하게 된다.

황성 YMCA 야구단은 105인 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었다.
이는 7년째 황성 YMCA 부회장직을 맡아왔던 윤치호가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몰리자 YMCA 활동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야구단도 1912년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팀 해체라는 시련과 맞닥뜨린다.윤치호가 1913 3월 투옥되자 일제는 조선 황실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황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이후 중앙YMCA로 부르도록강요했다. 질레트 총무는 '105인 사건'의 진상을 알렸다는 혐의로 결국 1913년 6월 쫓겨나다시피 조선을 떠난다.
이후 황성 YMCA는 중앙YMCA, 청년회관 팀, 1912팀 등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한다.

한국야구 최초의 스타는 황성 YMCA의 포수였던 허성이다. 허성은 황성 YMCA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체육 유학을 하였고, 오성학교를 지도하며 야구 명문으로 키웠으며 1924년에는 YMCA 선수들을 주축으로 한 국가대표팀의 단장을 맡아 하와이 원정에도 나섰다.

덧붙여 동경유학생 야구단에 대해 부연 설명하면, 1909년을 처음으로 총 10회동안 모국을 방문하였는데, 수준 높은 야구를 선보이며 야구 기술과 규약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유니폼과 장구를 갖추게 하고 한국야구의 실력향상을 꾀하게 하였다. 주요 선수로는 5차 방문단에 동참한 와세대 대학생 신분의 윤치영과, 배재고보와 연희전문에서 투수로 활약했고 일본 유학 중 1928년 유학생 야구단에 투수로 참가한 만능 스포츠맨 백기주가 있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에 야구의 특징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격구(擊球)나 타구(打球)와 비슷하다고 하여 서양식 '격구' 또는 '타구'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방망이를 이용하는 경기라 하여 '봉구(棒球)'라 했고, 일본에서는 넓은 들판에서 한다 하여 '야구(野球)'라 불렀다.
동경 유학생들은 '수구(手球)'라고 했으나 지속성을 갖지는 못했고, 결국은 야구라는 일본식 용어가 정착된 셈이다.

** 올해로 개교 110주년을 맞는 전통의 야구 명문 인천고는 이미 1899년 학교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인천영어야학회에서 서양의 공치기인 ‘베이스볼’을 한 기록이 있다며, 한국 야구의 도래지가 인천임을 주장하고 있다.
 인천야구구락부 초창기 멤버(1945년)인 김재은(73)씨 역시 “당시 재학 중이던 후지야마(藤山)라는 일본인 학생의 일기장에는 분명히 인천에서 야구를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며 인천이 한국 야구의 효시임을 밝혔다.
 반면 당시 인천영어야학회는 일본인 학교로, 진정한 의미의 한국 야구의 효시로 볼 수 없다는 게 대한야구협회의 입장이다. (인천일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