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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한국야구사] 3. 이영민

“해방 직후 그 분이 경기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만능 선수이자 멋진 남자였죠. 조선 최초의 스포츠 스타였습니다.” 원로 야구인 신현철(81) 옹이 기억하는 송운(松雲) 이영민(李榮敏)이다.
1920년대 미국에 베이브 루스가 있었다면 한국엔 이영민이 있었다. 1905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영민은 초창기 야구 뿐만 아니라 축구, 육상, 농구 선수로도 활약한 만능 스포츠맨. 1923년 대구 계성중학에서 동기생 백기주와 함께 서울 배재고보로 스카우트된 이영민은 첫 해부터 육상, 축구, 야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두각을 나타낸다. 1923년 6월3일 경성일보사 주최 경인역전경주대회에서 백기주, 함용화 등과 팀을 이뤄 우승을 차지한 이영민은 24년 11월8일 연희전문 주최 제2회 전조선 중등 육상경기 400
경기서 1분3초1로 2위에 오르더니 2년 뒤 연희전문 재학 시절인 26년6월14일 조선육상경기 대회 400 54초6의 조선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하기도 했다.

축구인 이영민은 1924년 배재고보 선수로서 제5회 전조선 축구대회에 공격수로 출전, 배재학당, 평양고보 등을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단짝’ 백기주는 골키퍼를 맡았다. 또 33년 10월22일부터 23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1회 경평축구 정기전에서도 이영민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그의 신분은 경성축구단 감독. 그는 9월19일 조선축구협회 창립 이사를 맡기도 했으며, 해방 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에 선임된 바도 있다.
다양한 재능을 뽐낸 이영민이지만 본업은 야구였다. 23년 제7차 동경 유학생 모국방문경기에 2루수로 출전, 당시 최강을 뽐내던 유학생팀을 11대6으로 격파하는 데 일조했으며, 1924년엔 조선 중학 선발팀에 뽑혀 일본 다카라즈카(寶塚) 초청경기에도 출전했다. 1928년 6월 8일 연희전문
경성의전(서울의대전신)간의 연경 정기전에서 연전 3번타자 이영민은 1회말 2사후 상대 투수의 ‘제2구 인코너’를 강타, 본루에서 '307척' 떨어진 스코어 담장을 넘겼다. 경성운동장 최초의 홈런이었다.

1929년 조선식산은행에 입사한 이영민은 조선의 '대표선수’로서 일본 간사이대 초청경기(1931년)에 출전했고, 1929년 4월12일 일본 중학야구계의 강자 가이소중(海草中)과의 경기에 투수로 등장, 단 2안타 완봉승을 거뒀다. 스코어는 5대0. 이영민은 또 게이오대와의 친선경기에서 일본에서 가장 공이 빠른 투수의 하나라고 자부하던 미야다케를 상대로 경성운동장 밖으로 날아가는 초대형 홈런을 기록했다. 미야다케는 이 당시 “내가 이렇게 큰 홈런을 맞은 것은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런 활약으로 이영민은 조선을 대표하는 야구선수로 일본에까지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1934년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의 메이저리그 올스타 일본 순회 경기에 일본 대표팀 14명의 일원으로 출전했다. 이 당시 메이저리그 올스타엔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 등 최고의 선수들이 포함돼 있었고, 대일본팀은 미즈하라 시게루, 사와무라 에이지 등 일본 프로야구의 초석을 세운 전설적인 스타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민족 차별이 심한 당시에 조선인 이영민에게 많은 출전기회가 돌아오기란 불가능했다. 이영민은 결국 11경기를 치르는 동안 5게임에서 주로 대타로 나와 6타석 5타수 1안타 삼진 2개 볼 넷 1개의 성적표를 남기는 데 그쳤다. 이영민이 이런 푸대접을 받은 것은 그가 태동기였던 일본 프로야구 팀들의 입단 권유를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대회에서 이영민은 세계적인 야구선수들과 만남을 가졌고 베이브 루스와 찍은 기념 사진이 현재 도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보관돼 있다.

해방 후 1946년에 열린 4도시 대항대회와 조·미친선야구대회에도 선수로 출전했던 이영민은 이후 야구 심판원과 대한야구협회 이사 등 야구행정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불우했다. 바로 아들의 총에 목숨을 잃은 것. 1954년 8월12일 새벽 이영민은 필운동 자택에서 괴한의 총탄 3발을 맞고 즉사했다. 경찰은 며칠 뒤 세 명의 범인을 검거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이영민의 세째 아들 이인섭(당시 20세)이 포함돼 있었다.

인물 좋고 실력 좋은 체육인 이영민은 1930년대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그를 사로잡은 사람은 당시 이화여전에서 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이보배였다. 이보배는 구한말 하와이에 진출하며 인삼 등을 취급하며 무역업으로 떼돈을 벌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서대문의 알부자 이지성의 딸. 이영민과 이보배의 결혼은 당시 최고의 스포츠 커플의 탄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영웅호걸’ 이영민의 여성편력 때문이었다.

이영민은 41년 이보배와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김 모씨와 재혼한다. 전처와의 사이에 이미 세 아들이 있었다. 이혼 후 이영민은 전처의 가족 및 자식들을 거의 돌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혼 당시 7살이었던 이인섭은 불량 청소년으로 자라났다. 1953년엔 배재고교에서 학교 밴드부 악기를 훔치다가 퇴학당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은 이인섭을 ‘꼬마 어깨’로 표현하고 있다.

아무튼 당시 쉽게 구하기 어려운 권총을 구해 아버지 집에 찾아갔던 사실을 볼 때 이인섭을 비롯한 전처 소생 아들들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사망 당시 이영민의 집에는 당시 30세였던 부인 이 모씨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신문에 보도됐다. 그해 11월 재판에서 이인섭은 단기 5년, 장기 7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고 주범 조용호는 무기 징역형을 받았다. 대한야구협회는 그를 추모하는 상을 마련, 1958년부터 매년 각종 국내대회에서 최고타율을 기록한 고교선수에게 '이영민 타격상'을 수여해 오고 있다.

* 조선일보의 고석태 기자님 블러그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