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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한국야구사] 4. 이원용

“이영민은 생전에 사생활에 문제가 많아 고교선수에게 존경을 받기 어렵다. 또 야구계에 더 많은 공로를 끼친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칠순 원로의 발언에 다른 사람들은 대놓고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김종락 회장이 나서서 "어려운 문제니 좀더 연구해 보자”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1969년 야구협회 대의원 총회에서 이영민 타격상 기금 증액 문제를 놓고 일어났던 일이다.

조선 최초의 체육 행정가인 이원용은 말년을 쓸쓸하게 보냈다. 후배들은 대부분 그를 멀리했다. “상당히 괴팍한 양반이셨죠. 원래가 약간 결벽증을 갖고 있던 분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더 심해졌어요. 후배들이 가까이 갈 수가 없었죠.” 원로 야구인 신현철 씨의 말이다. 이원용은 1957년 야구협회가 추진한 이영민 타격상 제정에 반대했다. 자신보다 아홉살이나 적은 후배의 이름을 딴 상이 제정된다는 사실을 섭섭하게 느낀 것. 이 일로 이원용은 협회와 결별했고, 말년엔 동맥경화증으로 칩거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원용이 한국 야구 발전에 끼친 공로는 이영민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신현철 씨는 “야구선수로는 이영민이 더 큰 족적을 남겼을지 모르나 기획력과 조직력은 이원용 선생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 초창기 한국 야구엔 그런 행정 능력이 더 필요했다”고 말하고 있다.

1896년 한성에서 태어난 이원용은 오성학교에서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1913년 오성학교 출신들로 오성구락부를 결성했고, 1914년엔 조선 내 일본인 최강팀이었던 용산 철도국을 두 차례나 꺾었다. 특히 그해 10월10일 훈련원에서 열렸던 1차전에서 오성구락부가 14대11로 이기자 화가 난 일본인 관중들은 운동장으로 뛰어들어 몽둥이를 들고 오성 선수들을 폭행했고, 조선인 관중들이 이에 대항하면서 집난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당시 투수였던 홍준기와 1루수였던 이원용은 이 일로 ‘야구계의 보배’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원용은 1917년 오성구락부와 중앙 YMCA를 통합해 ‘고려 구락부’를 결성하면서 특유의 조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후 1920년엔 지금의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를 결성했으며 1922년엔 사비를 들여 일본에 원정 중인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을 조선에 초청하기도 했다. 그해 12월8일 조선일보 주최로 용산 만철구장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이원용은 전조선군 주장을 맡았으나 경기엔 출전하지 않고 심판을 봤다.
당시 이원용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올스타의 허브 헌터 감독에게 조선 원정을 간청했다. 조선체육회가 직업 선수들 초청에 거부감을 나타내자 이원용은 동일은행에서 500원을 대출받는 등 직접 뛰어다니며 자금을 마련해 대회를 열었다. 헌터 감독은 조선에 건너온 뒤 환영식장에서 “이원용씨 덕분에 한국 땅을 밟게 돼 기쁘다. 오늘 여러분의 열정을 영원히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원용은 이 때의 인연으로 1929년부터 33년까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특히 체육 전문 기자로서 1931년엔 ‘과거 1년간의 운동경기계’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체육 활동을 정리하는 연재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으며, 1964년까지 청룡 야구 대회 관전평을 기고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다.

해방 후 조선야구협회 창립에 주역으로 참여한 이원용은 자유신문사 이정순 편집장과 함께 청룡기 중등야구 선수권대회 등 각종 야구대회 창설에 앞장섰다. 그는 뛰어난 행정력에도 불구하고 다소 독선적인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71년12월1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 조선일보의 고석태 기자님 블러그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