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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2.0 펌] 한국의 위대한 스포츠맨 100인 중 야구인

한국의 위대한 스포츠맨 100인(야구선수)

철완의 안경잡이
최동원 | 1958~

‘강철 어깨’로 불렸다. 시속 150km를 웃도는 불 같은 강속구와 폭포처럼 떨어지는 커브가 일품이었다. 경남고 시절이던 70년대 중반부터 동갑내기인 김시진(대구상고)-김용남(군산상고)과 ‘트로이카 시대’를 열고 고교야구의 폭발적인 인기를 이끌었다. 천부적인 승부사 기질도 지녔다. 아마추어 세계 최강인 쿠바와 맞붙은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벤치의 ‘빈볼 사인’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당당하게 실행하는 배짱을 자랑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로부터 표적이 된 최초의 한국선수였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1패)을 기록하며 롯데의 우승을 이끈 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현역 말년은 비운의 연속이었다. 1988년 연봉 문제로 롯데 구단과 갈등을 빚어 6월 말에야 재계약하고, 8월 10일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하다 좌절된 뒤 그해 가을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국내 최초의 ‘1000 탈삼진 투수’라는 명성처럼 역동적인 투구 동작은 아직도 팬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한국의 베이브 루스
이영민 | 1905~1954

그를 설명하는 데는 ‘이영민’ 이름 석 자로 족하다. 야구선수로는 투수, 포수, 중견수 등 포지션을 가리지 않았고, 스포츠맨으로는 야구, 축구, 육상, 농구 등 종목을 초월한 슈퍼 플레이어였다. 1928년 6월 8일 이영민은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야구장, 1926년 개장) 1호 홈런을 날렸다. 그 보름 뒤인 6월 23일 열린 전조선육상대회에서는 200m 조선신기록(23초6)을 수립했다. 지도자로는 1948년 런던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이었고, 체육행정가로는 조선야구협회(현 대한야구협회) 초대 부회장이었다.
그와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은 1934년 미?일 올스타 친선경기에서 어깨를 겨뤘던 미국의 베이브 루스와 일본의 사와무라 에이지. 이영민은 이 대회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화려한 선수 시절과 비운의 최후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불세출의 스타 이영민은 1954년 8월 12일 필운동 자택에서 3남 이인섭의 친구 조용호의 흉탄에 49세의 길지 않은 생을 다했다. 이인섭씨는 52년이 지난 올해 <주간야구>와의 인터뷰에서 사건 전모를 밝히며 참회의 눈물을 보였다.


국가대표 왼손 에이스의 효시
김양중 | 1930~

1958년 10월 21일 서울운동장. 해방 뒤 한국 야구가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구단(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과 일전을 치룬 날이다. 1회초 무사 2, 3루에서 등판한 왼손 투수 김양중은 9이닝 동안 삼진 4개를 잡아내며 7안타 2실점으로 빛나는 투구를 했다. 4삼진 가운데 하나는 내셔널리그 역사상 최고 타자로 꼽히는 스탠 뮤지얼에게서 잡아낸 것이다. 김양중은 광주서중 졸업반이던 1949년 청룡기 결승에서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 장태영의 경남중을 연장 11회 혈투 끝에 2-1로 꺾고 한국야구사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주최측인 자유신문사에서 경기 전 조사한 광주서중의 우승 확률은 0.06%. 장태영이 타자로 전향한 1950년대 한국 야구에 투수로는 김양중이 있었고, 포수로는 김영조가 있었다. 한국 성인 야구사에서 왼손 에이스 계보는 김양중에서 시작돼 김성근, 임신근, 이선희로 이어진다. 어우홍 전 롯데 감독은 “김양중의 공은 똑바로 들어오는 게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이 짧아 다섯 손가락을 다 써서 공을 잡아 변화가 심했다”고 회상했다.


불세출의 철인 홈런왕
박현식 | 1929~2005

1960년 봄철 실업야구연맹전. 농업은행(현 농협)과 남전(현 한전)과의 경기 8회 2사, 농업은행이 4-3으로 지고 있을 무렵 박현식이 핀치히터로 타석에 등장, 동점 홈런을 날렸다. 경기는 연장 끝에 농업은행이 승리. ‘아시아의 철인’ ‘불멸의 홈런 타자’인 박현식이 어째서 경기 후반 핀치히터로 등장했을까.
전날 육군팀과의 경기에서 중상, 동대문 이대부속병원에 입원 중, 라디오 중계를 듣고 있던 박현식은 환자복 위에 청소부 옷을 입고 고무신을 신은 채 병원을 탈출, 동대문야구장으로 달려와 후보선수의 유니폼을 벗겨 입고 타석에 들어섰던 것. 불굴의 투지, 집념, 성실, 천부의 자질, 이 모든 것이 박현식을 투?포수, 1루, 외야를 섭렵한 만능 수비수, 112개의 실업야구 통산 최고 홈런타자, 아시아 철인 등 숱한 별명을 갖게 한 연유다. 현명, 현덕 두 형도 뛰어난 야구선수 출신. 프로야구 삼미 슈퍼스타즈 초대 감독, KBO 심판위원장, LG트윈스 2군 감독을 역임했다. 180cm, 90kg의 거구로 100m를 14초에 주파한 불세출의 야구선수.


4할의 추억
백인천 | 1943 ~

1968년 가을, 각고 끝에 일본 프로야구 2군의 설움을 떨치고 1군에 올라간 백인천은 개선장군 같은 마음으로 큰아들 현일이를 데리고 고국 방문을 위해 김포공항에 내렸다. 모 신문사 공항출입기자가 “백인천 선수, 아직 2군에 있지요?”라고 물었다. 백인천이 얼떨결에 내뱉은 말이 “뭐야?”라는 뜻의 일본말 “나니(何)?”였다. 백인천이 일본에 간 지 10년도 안되어 우리말조차 잃어버렸다는 기사가 실려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 사건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힘든 고비를 뚫고 오른 1군인데 “아직도 2군이냐?”는 질문에 백인천의 발끈한 성격과 야구에 관한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가 빚어낸 해프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백인천이 일본 프로야구 유니폼을 입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61년 18세의 나이로 타이베이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구장 1호 홈런을 날리는 등 눈부신 그의 활약 때문이었다. 고교생 홈런왕, 일본 프로야구 진출 한국인 1호, 일본 프로야구 타격왕, MBC 청룡 창단 감독을 시작으로 국내 프로야구 5개 구단 감독 역임, 4할1푼2리의 국내 프로야구 시즌 최고 타율, 우리 야구계의 풍운아 백인천 야구의 족적이다.


원조 명포수 홈런왕
김영조 | 1923~

일본 프로야구에서 ‘데뷔 타석 홈런’을 기록한 한국인이 있다. 그가 바로 김영조다. 명문 와세다대학 야구부 주장을 지낸 김영조는 1944년 아사히(현 요코하마 베이 스타스)에 입단했다. 30경기에 출전, 타율 2할4푼8리 2홈런 20타점이 그가 남긴 기록이다. 2홈런 가운데 하나를 데뷔 타석에서 때렸다. 김영조의 일본 프로야구 경험은 한국 야구 발전에 밑거름이 됐다. 해방 뒤 김영조는 야구 이론에 대해서라면 늘 세 손가락 안에 뽑혔다. 선수로도 뛰어났다.
1950년대 각종 대회 홈런상은 김영조의 차지였다. 그는 이영민의 뒤를 이은 당대 홈런왕이었으며, 그 뒤를 박현식이 잇는다. 포수 마스크를 쓰면 수준이 다른 리드로 상대 타자를 농락했다. 금융조합 선수 시절 고교 야구 스타 김양중을 입단시킨 뒤 하루 700개 투구로 조련한 일화는 유명하다. 시대 차이가 있지만 이만수보다 뛰어난 포수였으며, 박경완보다 훌륭한 타자였다는 게 야구인들의 평가다.


메이저리그를 정복한 코리안 특급
박찬호 | 1973~

한국인의 힘을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 떨쳤다. 최초의 한국인 빅리거로서 차곡차곡 승수를 쌓아가더니 100승 고지도 넘어섰다. 박찬호의 빅리그행은 유망주들의 도전을 촉발한 신호탄이었다. 공주고-한양대 시절에는 임선동, 조성민의 그늘에 가려있었지만 혹사당하지 않은 싱싱한 어깨와 빠른 공 덕분에 꿈을 이뤘다. 그리고 ‘야구 재벌’의 꿈으로 이어졌다. 박찬호의 직구는 ‘광속구’로 통한다. 시속 150km를 훌쩍 뛰어넘는 위력적인 공으로 빅리그의 거포들을 위협했다.
1996년 5월 28일 LA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고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첫 승을 신고한 뒤 9년, 텍사스(2001년)를 거쳐 샌디에이고(2004년)로 이적해 2005년 6월 5일 캔자스시티를 제물로 대망의 100승을 달성했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았다. 꿈을 현실로 바꿔놓았다. 그저그런 유망주에서 스타로 자리매김한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으로서 주가를 높였다.


나타나면 모두모두 벌벌벌 떠네
선동열 | 1963~

‘메이저리그에 갔더라면.’ 선동열의 가치를 논할 때마다 떠올리는 가설이다. 이런 질문과 관계없이 1905년 미국 선교사 질레트가 이 땅에 야구를 전파한 이후 한국야구 100년사의 ‘최고 투수’임이 분명하다. 0점대 평균자책점 등 숱한 기록은 물론이고, 지휘봉을 잡고 있는 지금까지의 과정이 흠잡을 데 없다. 해태의 ‘무등산 폭격기’에서 주니치의 ‘나고야의 태양’까지 현해탄을 넘나들며 쌓아올린 마운드의 신화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야구가 공용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일찌감치 입증한 셈이다. 불멸의 기록으로 여겨지는 통산 평균자책점 1위(1.20),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89년부터 91년까지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달성이란 전대미문의 대기록이 ‘국보급 투수’ 선동열의 참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메이저리그 보스턴의 유혹도 뿌리치고 최고 투수로서 현역 생활을 마감한 뒤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위원으로 숨 고르기를 하더니 2005년에는 삼성 감독으로서 다시 한번 우승을 이끌며 명장의 길로 들어섰다.


불멸의 56발
이승엽 | 1976~

홈런의 대명사다. 한국에서 성장한 ‘토종 타자’도 세계 무대에서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2003년 아시아를 뛰어넘었다. 4월 5일 두산 박명환을 상대로 한 경기 2개 홈런을 터뜨린 것이 기폭제로 작용하면서 홈런 행진을 이어갔다. 5월에 15개, 6월에 14개의 몰아치기 아치를 그리면서 신기록 달성을 예감하더니 10월 2일 롯데전에서 대망의 56호 축포를 쏘아올렸다. 6월 22일 SK전에선 세계 최연소(26세 10개월 3일) 통산 300홈런까지 일궈내며 ‘라이언 킹’ 이승엽의 이름을 만방에 알렸다. 그리고 일본 열도로 들어갔다.
2005년 더욱 단단하고 매서워진 방망이를 앞세워 롯데 마린스를 재팬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았고,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중심포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젠 ‘일본 야구의 자존심’ 요미우리의 당당한 4번타자다. ‘순둥이’처럼 선한 인상이지만 지독한 ‘연습 벌레’다. 손바닥에서 피가 터져도 방망이를 휘두르며 일본 야구를 호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꿈은 빅리그로 향한다. 한국과 일본을 넘어 또다른 도전에 나서려 한다.


한국야구의 얼굴
김응용│1941~

한국야구의 간판이다.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경영자로서 늘 최고의 위치를 지켜가고 있다. 행복한 야구인이다. 커다란 덩치에서 내뿜는 장타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1960년 농협에 입단하려 했지만 둔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자 한국운수에서 연습생으로서 절치부심하며 희망을 키웠다. 3년의 노력 끝에 1963년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고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 결승전에서 일본을 물리치는 역전 홈런을 날리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30대의 젊은 날 8년 동안의 한일은행 감독 생활은, 1983년부터 2000년까지 프로야구 해태에서 17년 동안 아홉 번, 삼성 시절이던 2002년 한 번 통산 열 번이나 정상에 서는 밑거름이 됐다. 지금은 감독 출신 첫 프로야구단 CEO로서 삼성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소심한 듯 통이 크고, 어눌한 듯 달변이다. 얼핏 보면 대충대충인 듯해도 꼼꼼하게 모든 것을 챙기는 스타일. 수가 많은 ‘야구판의 영원한 지장(智將)’이다.